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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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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진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난양 출신의 도살업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복 여동생이 영제의 귀인이 되면서 낭중에 임명되었고, 이후 영천 태수를 거쳐 시중, 장작대장, 하남윤을 역임했다. 하진은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장군이 되어 군권을 장악했지만, 십상시와의 갈등 끝에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은 후한 왕조의 혼란을 심화시키고 동탁이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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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하진 청나라 삽화
청나라 삽화의 하진
이름하진
로마자 표기He Jin
수이가오(遂高)
작위신후(慎侯)
출생미상
출생지난양, 허난성
사망189년 9월 22일
사망지뤄양, 허난성
아버지하진(何真)
친척영사황후 하씨 (이복 여동생)
하묘 (계제)
소제 유변 (조카)
환관 장양의 (양)아들의 아내인 또 다른 여동생
직업군사 장군, 정치가
관직
대장군184년 – 189년 9월 22일
하남윤180년 – 184년
장작대장180년 – 184년
시중180년 – 184년
영천태수? – 180년
군사 정보
소속한나라
참전 전투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2. 생애

후한 말기의 외척이자 대장군. 허난 난양 출신으로, 본래 도살업자 집안에서 태어났다.[3] 같은 군 출신 환관 곽승의 도움으로 이복 여동생이 궁에 들어가 영제의 총애를 받아 귀인이 되면서[4] 하진 또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낭중을 시작으로 호분중랑장, 영천태수 등을 역임했다. 181년 여동생이 황후(하황후)로 책봉되자 중앙으로 돌아와 시중, 장작대장, 하남윤 등 요직을 거치며 빠르게 승진했다.[11]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대장군大將軍중국어에 임명되어 수도 낙양의 방위와 군비 정비를 책임졌고, 낙양에서 봉기를 준비하던 마원의馬元義중국어를 체포하는 공을 세워 심후慎侯중국어에 봉해졌다.[12] 난이 진압된 후에도 대장군직을 유지하며 군권을 장악했다. 188년, 영제는 하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원 팔교위를 창설하고 스스로를 무상장군無上將軍중국어이라 칭하며 총애하는 환관 견석에게 지휘권을 맡겨 하진을 그 아래에 두려 했으나,[8] 이 군대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곧 해체되었다.

189년 5월, 영제가 사망하자 십상시를 중심으로 한 환관 세력과의 권력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환관 견석은 하진을 제거하려 했으나 사마 판은潘隱중국어의 밀고로 실패하고 오히려 하진에게 주살당했다. 하진은 원소, 원술 등 명망 높은 사대부들의 지지를 얻어 조카 유변을 황제로 즉위시키고, 누이인 하태후와 함께 섭정이 되어 권력의 정점에 섰다.

이후 하진은 원소 등과 함께 환관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으나, 환관들과 연줄이 있던 하태후와 이복동생 하묘何苗중국어의 반대, 그리고 과거 환관의 도움으로 출세했던 자신의 입장 때문에 결단을 망설였다. 원소동탁董卓중국어 등 지방 군벌들을 낙양으로 불러들여 환관 세력을 압박하는 강경책을 제안했고, 하진은 마지못해 이를 따랐다. 그러나 정작 환관 제거에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189년 8월, 하진은 하태후를 설득하기 위해 무방비 상태로 입궁했다가 환관 장양, 단규, 필람 등이 미리 매복시킨 병력에 의해 살해당했다.[9] 하진의 죽음은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켜, 원소원술 등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장악하고 환관들을 대거 학살하는 참극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소제와 진류왕(헌제)이 동탁에게 보호받게 되었고, 권력의 공백을 틈타 동탁이 낙양을 장악하고 소제를 폐위시키는 등 전횡을 일삼게 되었다. 이는 결국 후한 말기의 극심한 혼란과 군벌 간의 내전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8][9]

2. 1. 배경 및 초기 생애

하진(何進)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허난 난양의 도살업자 집안 출신이다.[3] 이곳은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의 가문은 본래 백정 신분이었으나, 영제 재위 기간 중 같은 군 출신 환관 곽승의 후원으로 이복 여동생이 궁중에 들어가 영제의 총애를 받는 귀인이 되면서[4] 하진의 출세 길이 열렸다.

여동생 덕분에 하진은 처음 낭중(郞中)에 임명되었고, 이후 호분중랑장을 거쳐 영천군 태수로 전임되었다. 180년(광화 3년)[11] 마침내 여동생이 황후(하황후)로 책봉되자, 하진은 중앙으로 소환되어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후 장작대장과 하남윤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빠르게 승진했다.[11]

2. 2. 황건적의 난 진압

184년 (광화 7년) 거록군장각황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하진은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어 반란 진압의 총지휘를 맡았다.[11] 그는 황실 무기고를 관리하고 수도 낙양 주변의 중요 거점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장각의 부하 마원의(馬元義)가 낙양에서 일으키려던 봉기 계획을 미리 알아채 신속하게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12] 이 공로로 하진은 심후(慎侯)에 봉해졌다.

같은 해 12월, 왕윤십상시 중 한 명인 장양이 황건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장양이 오히려 왕윤을 모함하여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하진이 영제에게 상소를 올려 왕윤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하진은 대장군직을 계속 수행하며 군권을 장악했다. 188년(중평 5년), 영제는 서원삼군(西園三軍)을 새로 창설하고 스스로를 군대의 최고 지휘관이라는 의미의 '무상장군'(無上將軍)이라 칭했다.[8] 이는 강력해진 하진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영제는 자신이 신임하는 환관 견석에게 서원군의 지휘를 맡겨, 대장군인 하진까지도 그의 통제하에 두려 했다.[8] 그러나 이 서원군은 별다른 군사적 활동을 보이지 못했고, 결국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해체되었다.

2. 3. 군권 장악과 서원팔교위

광화 7년(184년), 거록장각황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하진은 대장군에 임명되어 반란 진압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다.[12] 그는 황실의 무기고를 관리하고 수도 낙양 주변의 중요 거점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장각의 추종자 마원의가 낙양에서 봉기하려는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 신속하게 진압하였다.[12] 이 공로로 하진은 열후 중 하나인 심후慎侯|심후중국어에 봉해졌다.[12]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하진은 대장군직을 유지하며 사실상 모든 황실 군대를 통솔하는 강력한 군권을 장악했다. 이 시기 그의 이복 동생 하묘何苗|하묘중국어를 비롯한 하씨 일족들도 주요 관직에 오르며 세력을 넓혔다.

중평 5년(188년), 영제는 점차 강해지는 하씨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원팔교위라는 새로운 군대를 창설했다.[8] 영제는 대규모 군사 사열을 통해 스스로를 '무상장군'이라 칭하며 군권을 과시했고, 자신이 신임하는 환관 견석에게 상군교위(上軍校尉) 직책과 함께 서원군 전체의 지휘권을 맡겼다. 이는 대장군인 하진마저도 견석의 지휘 아래 두려는 의도였다.[8] 그러나 이 서원팔교위는 실제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고, 창설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사실상 해체되었다.

189년 5월, 영제가 사망하자 하진과 환관 세력 사이의 권력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환관 견석은 하진을 황궁으로 유인하여 암살하려 했으나, 하진과 친분이 있던 하급 관리 판은潘隱|판은중국어이 이 음모를 미리 알려주어 하진은 위기를 모면했다. 곧바로 하진은 역으로 견석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그가 지휘하던 군대까지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후 명망 높은 원소원술 등 원씨 가문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진은 자신의 누이인 하황후의 아들 유변을 황제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소제로 즉위한 유변을 대신하여 하진은 당시 황태후가 된 누이와 함께 공동으로 섭정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2. 4. 황위 계승 문제와 십상시와의 갈등

영제 사후 황위 계승을 놓고, 아들 유변을 지지하는 하태후와 유협을 지지하는 영제의 어머니 동태후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십상시 중 하나이자 상군교위인 건석은 동태후와 함께 유협을 지지했고, 중군교위 원소는 하진의 편에 서서 건석과 대립했다.

189년 4월, 영제가 임종에 가까워지자 건석은 유협을 후계자로 삼으라는 영제의 유조가 있다며 하진을 제거하려 궁으로 불렀다. 하지만 하진과 가까웠던 사마 반은이 음모를 알려주어, 하진은 병을 핑계로 입궁하지 않아 위기를 모면했다.

189년 5월 유변이 황제로 즉위하자 외삼촌인 하진과 그의 지지자 원소의 영향력이 커졌다. 불안해진 건석은 십상시 조충 등과 다시 하진 암살을 모의했으나, 하진과 동향이며 하태후와 하진의 집권에 공이 컸던 환관 곽승이 조충과 상의하여 계획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건석의 편지를 하진에게 보여주었다. 이에 하진은 즉시 건석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그의 군대를 흡수했다.

궁중에서는 하태후와 동태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동태후가 자신의 조카인 표기장군 동중을 시켜 하진을 죽일 수 있다고 위협하자, 하태후는 이를 하진에게 알렸다. 같은 해 5월, 하진은 동태후와 동중을 축출했고, 두 사람은 얼마 못 가 사망했다. 이 일로 하진 세력은 민심을 잃었다.

평소 십상시 제거를 계획했던 원소는 하진에게 접근해 환관 숙청을 제안했다. 하진은 원소의 계획에 동조했으나, 환관들과 연줄이 있던 하태후와 하진의 이복동생 하묘의 반대로 실행을 주저했다. 하진 자신도 환관들과 결탁하여 권력을 잡았기에 이들을 완전히 적으로 돌리기를 꺼리는 우유부단함을 보였다.

상황이 교착되자 원소는 외부 군대를 수도 낙양 근처로 불러들여 태후와 환관들을 압박하자고 제안했다. 주부 진림 등은 위험성을 경고하며 반대했지만, 하진은 결국 원소의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 원소는 동탁, 왕광, 교모, 정원 등을 낙양으로 불러들였다.

원소는 하진이 또 마음을 바꿀까 두려워 "계획은 이미 진행 중이니 지체하면 변고가 생길 것"이라며 압박했다. 이에 하진은 왕윤을 하남윤으로, 원소를 사례교위로 삼는 등 청류파 사대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원소는 외부 장군들을 더욱 압박하고 금군에 자기 사람을 배치해 환관들을 감시했다. 공포에 질린 하태후는 마침내 십상시 이하 환관들을 파면하고 낙향시키도록 했으나, 원소가 이들을 제거하자고 거듭 권했음에도 하진은 또다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189년 8월, 원소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진은 방비 없이 입궁했다가 환관 장양, 단규, 필람 등이 이끄는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살해당했다. 장양은 하진을 꾸짖으며 가덕전 앞에서 그를 베었다.[9] 환관들은 조서를 위조하여 하진에게 우호적이던 소부 허상과 태위 번릉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상서가 의심하자 하진의 목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하진의 죽음에 격분한 그의 부하 오광원술 등은 즉시 궁궐로 난입했다. 원소 역시 숙부 원외노식과 합세하여 환관들에게 협조한 허상 등을 처단하고 하묘와 협력하여 조충 등을 죽였다. 이 과정에서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환관 세력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소제와 진류왕(헌제)은 환관 잔당에게 납치되어 도주했으나, 변란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온 동탁에게 발견되어 보호받으며 낙양으로 돌아왔다. 혼란 중에 하묘 역시 오광 등에게 살해당하면서 하씨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 권력 공백은 결국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2. 5. 십상시 제거 시도와 암살

원소는 평소 십상시를 모두 죽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진이 대장군이 되어 정권을 잡자 그에게 접근하여 십상시 제거 계책을 제안했다. 하진은 원소의 계획을 받아들여 십상시를 제거하려 했으나, 하태후와 그의 남동생이자 하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하묘가 반대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에 원소는 낙양 외부의 군대를 수도 근처로 불러들여 하태후와 환관 세력을 압박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주부 진림은 외부 군대를 끌어들이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하진은 결국 원소의 계획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원소는 이 계획을 지휘하며 동탁, 왕광, 교모, 정원 등 여러 장수들을 낙양 근처로 소환하여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이러한 군사적 압박에 많은 이들이 환관 주살을 주장했지만, 하태후만은 끝까지 반대했다.

원소는 십상시를 모두 죽이고 환관 제도를 폐지하여 국정을 개혁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입장이었으나, 하진은 정권의 안정적인 유지를 우선시했고 과거 환관들과 결탁하여 권력을 잡았던 관계로 그들을 완전히 적으로 돌리기를 주저했다. 이 때문에 하진은 원소가 계책을 제시할 때마다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며 결정을 미루었다.

계획이 지체되는 것을 우려한 원소는 "계획은 이미 완성되었고 형세는 모두 드러났는데, 더 지체하면 반드시 변고가 생길 것"이라며 하진을 압박했다. 이에 하진은 왕윤을 하남윤으로, 원소를 사례교위로 삼고 가절(假節, 부절을 내림)하는 등 원소를 중심으로 한 청류파 사대부들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 원소는 더욱 강하게 압박하여 외부 장군들을 도성 가까이 주둔시키고, 자신의 세력에 속한 무인들을 금군으로 배치하여 환관들을 철저히 감시하게 했다.

결국 공포에 질린 하태후는 십상시 이하의 환관들을 모두 파면시키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명령했다. 원소는 이 기회를 틈타 그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하진에게 세 차례나 간곡히 권했지만, 하진은 또다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답답함을 느낀 원소는 하진의 명령을 위조하여 각 주군에 환관들의 친족을 체포하여 심문하도록 지시하는 등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하진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나 하진이 머뭇거리는 사이, 십상시의 우두머리 장양은 하태후의 환심을 다시 얻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파면되었던 십상시들은 모두 복직되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하진은 마침내 직접 하태후를 찾아가 십상시를 죽일 것을 청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십상시들은 이미 하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수십 명의 병력을 궁궐 안에 매복시켜 두었다. 189년 8월, 하진이 장락궁에 들어가 하태후를 만나고 나오자, 십상시들은 하태후의 명령이라 속여 하진을 불러들였다. 방심하고 들어선 하진을 상방감(尚方監) 거목이 칼로 베어 살해했다.[3][4]

후한서》 하진전에는 당시 상황이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진이 장락궁에서 하태후에게 모든 상시(常侍) 이하를 죽이고 삼서(三署)의 관리들로 하여금 환관들의 거처를 포위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환관들은 과거 두무가 환관을 숙청하려 했던 사건을 떠올리며 불안해했다. 장양, 단규, 필람 등 수십 명은 무기를 들고 궁궐 옆문 근처에 매복했다. 하진이 나오자 하태후의 조서(詔書)라고 속여 불러들인 뒤, 장양은 하진을 꾸짖었다.

'''"천하가 어지러운 것은 우리들 잘못 때문 만은 아니오! 예전에 영제(靈帝)가 하태후랑 사이가 안 좋아 거의 하태후를 황후에서 폐립하려고 했을 때 우리들이 울면서 간신히 구해 주기도 했고 각각의 집안에서 천만금을 각출하여 예물을 들여 공을 기쁘게 해드렸던 것은 모두 공의 집안에 의탁하려고 그랬던 것이오! 그런데도 이제 공이 우리들을 모조리 죽이려 드니 이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니오? 공은 우리들이 더러운 놈이라는데 그렇다면 공의 사람들 중에 그렇게 충성스럽고 깨끗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요?"'''

하진이 제대로 답하지 못하자, 상방감 거목이 가덕전(嘉德殿) 앞에서 하진을 베었다.

하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평소 하진에게 신망을 얻고 있던 원소원술 등은 격분하여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공격해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이 혼란 속에서 소제와 진류왕(훗날 헌제)이 잠시 환관들에게 납치되었다가, 마침 낙양으로 군대를 이끌고 온 동탁에게 발견되어 보호받게 되었다. 또한, 하진의 이복동생 하묘 역시 이 혼란 중에 부하 오광 등에게 살해당하면서 하씨 세력은 완전히 몰락했다. 환관 세력과 외척 세력이 모두 제거된 권력 공백 상태에서 동탁이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낙양을 장악하고 조정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동탁은 곧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황제로 세웠으며, 이는 후한 말기의 극심한 혼란과 내전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8][9]

3. 하진 사후

하진이 사망한 후, 원소는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난입하여 십상시를 포함한 환관 세력과 이들에게 동조한 탁류 관료 약 2,000명을 학살했다.[5] 이 과정에서 하진의 의붓형제인 하묘는 하진 암살에 동조했다는 오해를 받아 오광과 동탁의 동생 동민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원소는 자신이 불러들인 동탁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다.

권력을 장악한 동탁은 즉시 황제 소제를 폐위하고 그의 이복동생 헌제를 새로운 황제로 세웠다. 또한 하진의 누이이자 폐위된 소제의 어머니인 하태후와 소제를 감금했다. 동탁은 하태후를 감금 이틀 만에 독살했으며, 소제 역시 몇 달 뒤 살해했다. 동탁의 잔혹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하묘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훼손하고 길거리에 버렸으며, 하태후와 하묘의 어머니인 무양군(舞陽君)마저 살해하여 시체를 유기했다.[5]

동탁의 이러한 포악한 통치에 반발한 원소는 각지의 제후들을 규합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했고, 이는 후한군웅할거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3. 1. 가족 관계

하진


하진에게는 최소 두 명의 이복 또는 의붓 형제가 있었다.

  • 하황후: 영제의 황후이자 소제의 어머니. 하진과는 아버지는 같으나 어머니가 다른 이복 여동생이다.
  • 하씨 부인: 하황후의 친 여동생으로, 환관 장양의 양아들과 결혼했다. 따라서 하진에게는 이복 여동생이 된다.
  • 하묘(何苗): 자는 숙달(叔達). 본명은 주묘(朱苗)이다. 하황후의 어머니가 주씨(朱氏)에게 재가하여 낳은 아들로, 하황후와는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가 다른 이부 오빠이다. 따라서 하진과는 혈연 관계가 없는 의붓 형제이다. 하묘는 거기장군(車騎將軍) 벼슬을 지냈으나, 하진 사후인 189년 9월 말, 하진을 암살한 환관 세력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하진의 부하였던 오광(吳匡)과 동탁의 동생 동민에게 살해당했다.[5]


역사 기록에 따르면 하진에게는 최소 한 명의 아들 하현(何咸)이 있었다. 하현은 189년 하씨 가문이 몰락할 때 살아남았으나 일찍 사망했다. 하현에게는 하안(何晏, 196년경–249년)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하현 사후 그의 아내 윤씨 부인(尹夫人)은 군벌 조조에게 재가했고, 조조는 하안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하안의 출신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 위략(魏略)에서는 하안이 하진의 손자가 아니라 하묘의 손자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 근거로 하안이 조상의 고향에 묻히는 관습과 달리, 하진의 고향인 남양(南陽)이 아닌 여강(廬江)에 묻혔다는 점을 든다. 당시 여강에는 하묘의 본래 성씨인 주씨(朱氏) 가문이 여럿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Houhanshu vol.104
[2] 서적 Houhanshu vol. 69
[3] 서적 Houhanshu, vol.10 part 2
[4] 서적 Houhanshu vol.69
[5] 서적 Houhanshu, vol.69
[6] 문서 何晏の記事 何晏#脚注(父と子などについて)
[7] 서적 何晏叢考
[8] 문서 石井仁・窪添慶文
[9] 서적 後漢政治制度の研究 早稲田大学出版部 2014
[10] 서적 후한서 제71권 하진전 5세기
[11] 서적 후한서 제71권 하진전
[12] 서적 후한서 제71권 하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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